하루키와 스파게티 🍝

나도 모르게, 읽고 나면 부엌에 서게 되는 책들이 있다. ≪마틸다≫의 초콜릿 케이크나 ≪작은 아씨들≫의 바닷가재 샐러드처럼, 심지어 어떤 책은 그 책에 등장했던 음식이 먼저 떠오르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으면 유독 식욕이 샘솟는다. 오죽하면 하루키의 글 속에 등장하는 음식을 연구하는 ‘부엌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모임’까지 생겼을까.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나는 스파게티를 계속 삶았다. 그건 마치 무엇인가에 대한 복수 같기도 했다. 배신 한 애인이 보내온 낡은 연애편지 다발을 난롯불 속에 집어넣는 고독한 여자처럼 나는 스파게티를 계속 삶았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 한 사람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결정하기 어렵다는 듯이 방 앞을 서성이다가 결국 노크도 하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밖에는 비가 온다.

1971년 자기들이 수출한 것이 ‘고독’이었다는 것을 알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필시 대단히 놀랬을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스파게티의 해에> 중에서

누구에게나 고독한 시절이 있다. 나에게는 둘째 아이를 낳고 난 후가 그랬다. 하필 그 시기에 코로나가 터졌고, 경력단절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으며, 남편은 일이 많이 바빠졌고, 동생의 출현으로 첫째는 한껏 예민했다. 그 와중에 신생아 둘째를 돌보느라 잠도, 쉼도 부족했던 나는 나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두 아이와의 일상이, (너무 미안하게도) 당시에는 버거웠다. 하지만 내가 우주이고 세상이었던 작은 아이들에게 내 사정을 논할 순 없으니 알아서 버텨야 했던 시기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고독한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나만을 위한 스파게티가 내게는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무심코 책장에서 하루키의 단편 소설집을 꺼내 읽은 것이 계기였다. 라면만큼 끓이기 쉽고, 별 재료 없이도 뭔가 차린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마음에 꼭 들었다. 누군가를 위해 차리는 밥 말고, 나만을 위해 만드는 한 그릇 요리. <스파게티의 해에> 속 주인공처럼 그 해는 나에게 스파게티의 해였다.

★ 라면보다 쉬운 스파게티 만들기 ★

시판 소스를 이용하면 완벽히 맛이 보장되겠지만, 그마저도 준비할 필요 없이 냉장고에 있는 재료만으로 언제나 활용이 가능하다. (전문 요리사가 보면 기함을 하겠지만ᄒᄒ) 스파게티 면, 올리브유, 마늘. 이 필수 재료 세 가지만 있다면, 나머지는 취향껏, 냉장고 사정껏 넣어 근사한 한 끼를 만들 수 있다.

1. 넉넉한 크기의 냄비에 물을 끓인다. 끓일 때 소금을 한 꼬집 넣어준다.
2. 물이 끓으면 스파게티 면을 넣어 끓인다.
3. 면을 끓일 동안 팬에 올리브유를 넉넉히 두르고 마늘을 볶는다. 편마늘을 넣으면 좋겠지만 없으면 다진 마늘도 괜찮다.
4. 마늘이 익었다 싶으면 다 삶아진 스파게티 면을 건져 넣고, 면수를 넣어준다.
5. 여기까지가 기본이라면, 이다음부터는 사정에 맞게 재료를 넣어주면 된다. 속을 발라 낸 명란젓을 넣고 매콤함을 위한 페페론치노를 부숴 넣으면 명란 파스타, 햄이나 베이컨을 썰어 넣고 파마산 치즈를 듬뿍 뿌리면 베이컨 파스타가 된다.
생새우 같은 해산물은 면을 넣기 전 마늘을 볶을 때 같이 볶아준다. 취향에 맞게 페페론치노나 청양고추를 넣어 맵기를 조절하고, 간이 안 맞을 때는 재료에 맞게 소금이나 치즈, 멸치 액젓 등을 넣어준다.

스파게티의 해를 겪으며 터득한 것이 하나 있다. 행군할 때 아득한 도착 지점을 보기보다 눈앞의 한 발 한 발에 집중해야 완주할 수 있는 것처럼, 인생 역시 헤쳐 나갈 길이 아득하다면 당장의 한 끼, 작은 일상에 집중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가끔 주어지는 혼자만의 한 끼, 내 취향으로만 채운 식사 시간으로 작은 만족감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어느새 아이들은 자랐다. 점점 나를 필요로 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그만큼 나는 나를 채우는 방법과 시간이 많아졌다.

때로는 버티는 것이 너무 지난하고도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나는 이것밖에 안 되나 싶고 이럴 바에 야는 그냥 포기하자 싶은 때가 있다. 하지만, 버티자. 분명 언젠가는 더 나아질 테니, 버티는 것도 의미가 있다. 그러니, 우리 함께 버티자.

스파게티 재료.zip